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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표세철목사 2014-04-20 추천 0 댓글 0 조회 148



140420부활주일

설교자/표세철목사

본문말씀/사도행전10:34-43

제목/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예수님이 붙잡히시던 날 제자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그들은 다시 모였다.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 모였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으로부터 말씀을 들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체험하였다. 그리고 부활의 증인으로 거듭났다. 성령의 오심을 체험하고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받았다. 하나님이 제자들에게 능력을 주신 이유는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게 하심이었다. 예수님의 증인,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게 하심이었다. 부활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전하는 것을 주저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부활 증거를 제한하고 반대하는 권력자들 때문이었다. 권력자들은 권력의 힘으로 부활의 증인을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생명의 위협 앞에는 사실도 거짓으로 바뀔 수 있다. 하지만 성령의 능력이 있을 때 사실이 사실대로 드러난다.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의 부활이 더 널리 확실히 증거된다. 조직적인 방해꾼들이 있지만 결코 부활의 복음 전파가 위축되지 않는다. 제자들은 부활의 증인으로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였다. 예루살렘과 유다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됨을 보았다.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보았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았고 하나님이 사람을 혈통과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심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1. 예수님은 화평의 복음이시다.

유대인들은 자기들만 구원의 대상인 줄로 믿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들로부터 공격을 받으면 받을수록 이 믿음이 더 확고해졌다. 메시야가 오셔서 자기들을 구원해 주실 것이라 믿었다. 유대인들은 겉으로 이방인과 함께 해도 속으로는 경멸하였다. 이방인은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기들만이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의식이 강했다. 만약 이방인이 구원을 받는다면 유대인들로서는 펄쩍 놀랄 일이다. 요나가 그런 경우였다. 유대인들의 생각과 의식이 기독교인들에게 침투하였다.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이방인이 과연 구원받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다. 이는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괴리이다. 이 괴리를 해결하지 못하면 화해가 이루어지지 못한다. 어떤 방법으로 괴리가 해결될 수 있을까? 혈통과 민족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이 깨지기 전에는 어렵다. 이것을 깨뜨리신 분이 곧 하나님이시다. 베드로가 깨닫고 입을 연다.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35절). 그렇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으로 가능하다(요1:13). 온 인류에게 구원의 기회가 주어졌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이 기회를 주셨다. 이것이 곧 화평의 복음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가 화해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화해되는 복음이다.

예화-조선 땅에 찾아온 부활절 선물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난 조선의 정세는 매우 불안하고 혼란스웠습니다.

당시 국제 사회는 조선을 ‘소망 없는 은둔의 땅’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황무지이기 때문에 더욱 복음이 증거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미국의 젊은 선교사들이 있었습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였습니다.

그들은 순교의 각오로 파송을 자원했습니다.

1885년 4월5일 부활절.

거센 풍랑을 헤치고 한 척의 배가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했습니다.

단순한 입항이 아니었습니다.

이 나라에 처음으로 복음이 들어오는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부활절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조선땅을 밟았습니다.

황무지에 소망의 빛이 비치는 순간이었습니다.

아펜젤러는 본국에 보낸 첫 선교 보고서에서 이날의 감동을 이렇게 밝혔습니다.

“우리는 부활절에 이곳에 왔다.

그날 사망의 철창을 쳐부수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조선의 결박을 끊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빛과 자유의 세계로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했다.”-http://cafe.daum.net/yacop

2. 예수님은 자유의 복음이시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기 이전에 세례 요한이 왔었다. 세례 요한이 복음의 전주곡을 울렸다. 그리고 복음의 역사가 예수님을 통해 드러났다. 갈릴리에서 시작된 복음의 역사가 유대 전역에 퍼졌다. 지금 베드로에게는 복음이 이방으로 퍼져나갈 것이 느껴진다. 베드로가 만난 고넬료가 그 증거이다. 베드로의 이 깨달음이 역사에서 증명되었다. 복음이 전 세계로 퍼졌다. 전 세계 구석구석 복음이 전해졌고, 우리에게도 전해졌다. 우리에게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기회가 주어졌다. 우리도 예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복을 얻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5:1)는 바울의 권면이 우리에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유의 복음을 전하셨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예수님이 다니시며 마귀에게 눌린 사람들을 고치셨다. 예수님이 눌린 사람들에게 영적 자유를 허락하셨다. 한 군데에서만 아니라 두루 다니시며 병자를 고치시고, 위로와 자유의 복음을 전하셨다. 죄의 권세와 사단의 권세가 더 이상 사람을 억누르지 못하게 되었다. 악한 권세가 예수님의 권세에 맞서지 못하고 도망갔다. 악한 것들에 의해 눌림을 받던 영혼들이 놓임을 얻었다.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예수님이 그 일을 이루셨다. 예수님이 자유의 복음으로서 일하셨다.

예화-원수를 다이기고 무덤에서 살아나셨네.

1874년 남북 전쟁 당시 미국 전역은 쑥대밭과 같았습니다.

젊은이들은 전쟁터에 나가 피를 흘리며 죽어갔습니다.

악성 전염병이 돌아 죽은 사람들을 쓰레기 묻듯 하면서 사람들의 심성은 찢겨져 어디서도 희망이 보이지 않던 때였습니다.

그런 절망 가운데 하나님께 기도하던 로우리 목사(S. R. Lowery)가 있었습니다.

그는 깊이 기도하던 중 심령이 열려 부활하신 주님을 보게 됩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이 나의 주님이시라면, 또 죽음이 끝이 아니라 다른 시작이라면,

이렇게 절망하고 쓰러져 있어서 될 일이 아니지 않는가?"

그는 주님 안에서 전쟁터가 지옥이 될 수 없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전염병의 절망도 부활의 생명을 꺾을 수 없다는 확신도 생겼습니다.

믿음을 갖게 된 로우리 목사는 일어나 사람들을 격려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지금도 살아 계신 부활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런 벅찬 감격 속에 찬송가 160장은 작사 작곡된 것입니다.

"원수를 다 이기고 무덤에서 살아 나셨네 어두움을 이기시고 나와서 성도 함께 길이 다스리시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http://cafe.daum.net/yacop

3. 예수님은 부활의 복음이시다.

하지만 예수님의 복음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지 않았다. 중간에 방해꾼들이 치밀한 계획에 의해 복음을 방해 하였다. 그것이 곧 십자가였다. 훼방꾼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없어지면 복음도 끝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지금 훼방꾼들은 누구 하나가 없어지면 복음의 역사가 중단될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훼방꾼들의 착각이 여지없이 빗나갔음을 만방에 알리셨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다시 살리심으로 알리셨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예수님이 스스로를 부활의 복음이시요, 생명의 복음이심을 드러내셨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복음의 증인이 되라고 하셨다. 제자들은 나타나신 예수님과 함께 음식을 먹었다. 제자들은 보고 경험하였으므로 예수님의 부활을 결코 부정할 수 없다. 예수님이 하셨던 일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잠잠히 있을 수도 없다. 제자들이 부활의 복음을 전하였다. 예수님의 명령을 지켜 증인이 되었다. 증인은 세상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사명이 아니라 제한된 사람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증인됨은 먼저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부활의 복음을 들어야 할 대상은 세상 모든 인류이다. 그러나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먼저 믿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택하신 소수이다. 먼저 말하는 사람이 듣는 사람을 앞선다. "전파하는 자가 없이 없이 들으리요"(롬10:14). 곧 우리들이다.

4. 예수님은 죄 사함의 복음이시다.

로마 시대에 십자가는 죄인을 매다는 형틀이었다. 십자가에 달렸다면 일단은 죄인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도 죄인인가? 아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다(히4:15). 그런데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는가? 왜 예수님이 죄도 없이 죄인의 모습을 가지셨는가?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양심이 있는 사람 편에서 보면 매우 억울한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 보자. 하나님은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삼으셨다. 예수님이 속죄의 제물로 희생되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죄인들의 죄가 용서받게 되었다. 제자들이 이것을 깨달았다.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요일3:5).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죄 사함의 복음이 되셨다. 알고 보니 죄 사함의 복음은 예전부터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았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희생됨으로 인하여 우리의 죄가 용서를 받았다. 예수님이 죽을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 예수님이 생명 주시는 일에 전권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으셨다. 그리고 우리의 재판장이 되셨다. 예수님은 우리를 정죄하는 재판장이 아닌 용서하는 재판장으로 나타나셨다. 우리는 이 예수님을 믿는다. 믿는 우리에게 죄 사함의 은혜가 있다. 부활의 아침에 우리에게 이 은혜가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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