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 개역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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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306
설교자-표세철 목사
본문-로마서13:8
제목-사랑의 빚
☞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 본문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는, 성도들이 살아가는 데 있어 갚지 않고 남겨두는 빚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둘째는 사랑이란 성도들이 지불해야 하는 빚으로서 ‘다 갚음’이 없는 영원한 부채라는 것이다. 한편 ‘아무에게든지’라는 표현은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하는 대상이 ‘성도들’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에까지 확장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 ‘다 이루었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플레로켄’은 현재완료형이다. 이는 사랑하는 순간 율법을 이룬 것임을 말해준다. 여기서 바울이 율법을 무시하지 않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율법은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완성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일치한다(마 5:7).
일찍이 문호 ‘톨스토이’는 말하기를,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고 고귀한 것은 사랑이다”라고 했으며,
‘페스탈로찌’도 “가장 위대하고 순수한 정의의 원천은 사랑뿐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랑이 이 세상의 모든 가치의 최고봉이라는 말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바울은 놀라운 선고를 합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율법의 완성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종교인들에게는 율법이 신앙적 삶의 유일한 근거요, 교본이요, 경전이었습니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한 가치로 완성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혁명적인 선포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기독교의 사랑은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예화-백배의 대가
적은 것을 주고 훨씬 많은 대가를 받는다는 속담으로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말이 있다. 마닐라에 살고 있던 중국인 소년이 자전거를 사려고 저축한 돈 3파운드로 빵을 사 중일 전쟁으로 인한 중국 본토의 이재민을 돕는 구호 위원회에 보냈다. 구호 위원회는 이 빵을 그대로 보낼 수 없어 ‘애국 빵’이란 이름으로 시중에 팔았다. 이 3파운드의 빵은 3백 파운드로 불어났다. 이 거액은 소년의 이름으로 중국 본토에 보내졌고 이 소문을 들은 미국 헨리 포드씨의 부인이 이 소년을 위해 멋진 자전거를 사보냈다 한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이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 6:38) 동양 윤리는 “내가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을 타인에게 행하지 말라”는 것이나, 기독교 윤리는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라”는 것이다.
1. 율법을 다 이루는 사랑
나라에는 법이 있고 종교에는 교리라는 게 있으며, 사회에는 규범 및 관례가, 생활에는 윤리와 도덕이 있게 마련인데, 아무리 완벽하고 훌륭한 법이나 제도도 사랑을 능가하지는 못합니다.
사랑 안에 이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랑을 실천할 때 나라의 법을 이루고 종교적 가르침을 이루며, 성도로서의 의무를 이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특별히 '완성'이라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리 재료가 좋고 설계가 완벽한 건물이라도 그것이 완성되기 이전에는 용도라든지 외간에 있어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게 됩니다.
완성될 때 효용성이라든가 예술적 가치 등을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예화-세상 욕심을 벗어 던지라
알렉산더 왕이 이끄는 군대가 페르시아를 쳐부수기 위해 전진하고 있었을 때의 일입니다. 군인들은 패전을 결심이라도 한 듯 힘없이 행군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알렉산더 왕은 그 이유를 재빠르게 알아차렸습니다. 군인들은 여러 전투에서 얻은 노획물들을 몸에 잔뜩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군인들의 행군을 잠깐 멈추게 한 알렉산더 왕은 노획물들을 모두 모아 불태울 것을 명령했습니다. 이 명령에 군인들은 심한 불평을 늘어놓았지만, 결국 그렇게 함으로써 페르시아와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군사입니다. 그렇지만 군사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적인 욕심을 잔뜩 짊어진 채 군사 노릇을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지금 나의 신앙 생활이 피곤하다면 세상 욕심을 짊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참된 군사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2.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함
사랑의 구체적 나타남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을 평가하는 기준에 대해 교훈받게 됩니다.
아무리 교리적으로 완벽한 종교, 무흠한 신앙이라 할지라도 사회에 유익을 끼치지 못하고 이웃에게 덕을 세우지 못한다면 참된 종교, 참된 신앙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본문에 빚이란 말이 나옵니다.
빚이란 상대에게 불만과 불신의 고통을 주며 친한 우정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빚을 방치해 두는 것은 진실된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빚은 서로 질 수 있습니다. 사랑은 갚을 수 없는 무한의 부채요, 갚으려고 하면 더욱 커지기만 합니다. 이러한 사랑의 부채는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완성합니다.
사랑을 받은 자는 사랑하는 것을 배우며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사랑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사랑하는 자는 이미 율법을 지키는 자가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평범한 생활 가운데서 가까운 이웃을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할 때 그는 이미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율법을 모두 실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조차도 사랑해 주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교리나 교권이 중심이 되는 종교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종교이므로 성도 개개인이 이웃에게 악을 행치 말고 사랑을 실천하여 덕을 세우도록 힘써야 합니다.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질책하신 이유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들은 객관적으로만 평가한다면 나무랄 데가 없는 완벽한 종교주의자들이었으나 이웃에게 덕을 세우는 대신 악을 행했으므로 책망을 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은 율법을 폐지하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심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에게 ‘사랑하라’는 행위 규범으로서의 율법을 교훈하여 주셨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율법을 주신 목적에 부합된 성도의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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